개인적으로 오디오를 즐기면서 케이블에 많이 투자하는 것을 꺼리는 편이다. 오디오 실용론을 깊이 신봉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경제적인 이유가 가장 크고, 다음으로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하건데 케이블을 바꿨을 때의 변화에 민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값비싼 케이블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 하고, 여유가 있어도 오디오 케이블이 그다지 끌리지 않는다.

이러한 취향에는 기본적으로 나의 청각과 소리의 평가과정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인식이 깔려있다. 소리의 평가가 몸의 상태나 기분에 따라 크게 달라지기도 한다는 점과 청각 그 자체로 평가하기 보다는 다른 정보-케이블의 외양이나 구조나 심선의 두께, 재질, 브랜드 혹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가격대 등에 많은 영향을 받아가며 평가를 한다는 점을 스스로 의식하기 때문에 케이블에 대한 각종 찬사나 화려한 스펙, 계측기로 측정한 결과 등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게 되었다.

그렇지만 케이블에 무관심하지는 않은데 오디오 마니아처럼 케이블에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을 뿐 액세서리로 관심은 갖고 있다. 그리고 이런 나의 관심은 케이블 바꿈질이 아니라 기존에 쓰던 케이블을 바꿔야 하는 상황에 처할 경우 보다 믿음을 주는 것으로 교체하는 방식으로 표출된다.

지금 소개하는 HD 600 용 케이블도 이러한 맥락에서 만들게 되었다. HD 600의 번들 케이블의 오른쪽이 어느날 갑자기 단선된 것이다. 그것도 선의 중간 부위가 끊긴 것이 아니라 핀커넥터 근처가 단선되어 고치기가 좀 난감했다. 그래서 케이블을 아예 새로 만들어 버렸다.

완성한 HD 600용 케이블

완성한 HD 600용 케이블



HD 600용 케이블 제작에 있어 가장 핵심이 되는 핀 커넥터는 전에 하스(헤드폰 앰프 스테이션)의 회원인 최문협님에게 선물로 받았다. 아마 이것이 없었다면 새로 만드는 것 자체를 생각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HD 600 핀 커넥터

HD 600용 핀 커넥터

핀 커넥터는 황동 재질에 니켈+금도금 되었다. 얼핏 보면 같은 핀으로 보이지만 윗쪽의 굵은 핀은 접지용이고, 아랫쪽의 얇은 핀은 신호용으로 구분된다. 국내의 케이블 업체인 '마이 케이블'에서 전에 이런 핀을 만들고자 시도했다가 너무 핀의 두께가 얇아 포기했다고 하는데, 업체에서도 포기한 핀 제작을 이렇게 해낸 최문협님의 대단한 노력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다음으로 중요한 선재는 벨덴 1192A를 사용했다. 쿼드스타 구조의 4심선과 PE(폴리 에틸렌) 절연체, 주석도금된 실드, PVC 외피의 이 선재는 마이크 케이블용으로 주로 쓰이며 전반적으로 평이 좋다. 처음에는 카나레 L-4E6ATG과 벨덴 1192A를 놓고 고민했는데, L-4E6ATG는 선재가 무척 부드러운 점이 마음에 들었지만 외피가 두꺼워 1192A보다 무거워 망설여졌고, 1192A는 상대적으로 좀 뻣뻣한 느낌이 들었지만 외피가 얇아 가벼웠기 때문에 1192A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뉴트릭 55 스테레오 플러그

뉴트릭 55 스테레오 플러그

55 스테레오 플러그는 뉴트릭 단자(블랙)를 썼다. 금도금된 다른 플러그도 있었지만 뉴트릭이란 브랜드의 신뢰도와 검은색이 선택의 주요인이다.

익스펜더는 케이블 외피에 먼지가 달라붙거나 때 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씌웠다.

땜납도 신경을 써서 카다스 은납을 사용했다. 체감할 수 있는 향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양이 소모되는 작업이 아닌데다 심리적인 기쁨(?)을 얻을 수 있기에 과감히 투입했다.

만들면서 어려웠던 점은 핀이 헤드폰에 장착되고 나면 걸려서 잘 빠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납땜한 선재가 핀을 끼우고 빼다가 여러 번 끊어져 버렸다. 그래서 핀의 끝 부분의 볼록한 부분을 사포로 핀 장착 시 어느정도 걸리면서도 보다 수월히 착탈가능할 정도로 살짝 갈아버렸다.

내가 만든 완성한 HD 600용 케이블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핀에 직접 심선을 연결한 것과 직접 만든 핀 부분의 몸통이다. 지금까지 만들어진 대부분 완성한 HD 600용 자작 케이블은 기존의 번들 케이블의 핀 단자 부분을 그대로 사용하여 기존의 선에 새로운 선을 잇는 방식으로 만들어졌거나, 예전에 '마이케이블'이란 케이블 업체에서 HD 600용 케이블을 개조한 것처럼 핀에 직접 심선을 연결하고 수축튜브를 여러 겹으로 감싸는 식으로 몸통을 대체한 것이다. 전자는 선재를 완전히 교체하지 않고 기존의 선에 잇기 때문에 기분상 찝찝하고, 후자는 잦은 착탈 시 자주 몸통 부분의 선이 끊어지거나 납땜 부분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다.

글루건으로 직접 제작한 핀 커넥터용 몸통

핀에 직접 심선을 연결하는 것과 핀을 고정하는 몸통을 위해서 처음에는 기존 번들 케이블의 핀과 플라스틱 몸통을 재활용하고자 했는데 핀은 재활용이 가능하지만 번들 케이블의 몸통은 너무 크기가 작아 개조용 선재의 심선을 넣을 수 없었다. 핀에 직접 심선을 납땜하는 것은 최문협님이 선물해준 핀 덕분에 보다 쉽게 해결이 되었는데 몸통이 문제였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글루건(핫멜트)이다. 접착제로 많이 쓰이는 글루건은 뜨거울 때는 유동성이 있으나 식으면 굳는 성질이 있다. 굳은 뒤에 완전히 경화되는 것은 아니지만 약간 말랑말랑한 상태로 형태가 유지되며 강한 힘을 가하면 늘어나다가 끊어진다. 이런 글루건의 특성을 이용하여 직접 몸통을 만들었다. 핀을 헤드폰에 꽂은 상태에서 글루건으로 그 빈틈을 메워서 굳힌 뒤에 꺼내는 방법이다. 접착제인 글루건 때문에 빼내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지만 말랑말항한 성질 덕분에 수월하지는 않지만 가능하다.



몸통의 성형을 끝낸 뒤에는 핀 커넥터 연결 부분은 검은색과 빨간색 수축 튜브로 좌/우를 구분해주었다.

어찌 보면 제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소리의 변화는 번들 케이블에 비해서 소리가 좀 더 맑고 풍성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도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소리 자체보다는 다른 조건에 의해서 이 케이블을 더 좋다고 평가하게 된다. 이는 HD 600 번들 케이블의 부심할-OFC가 사용되었다고 광고는 하지만 그 두께의 얇음에서 기인하는-  때문에 더욱 부각되는데 기본적으로 케이블이 두꺼우며 이름있는 메이커의 것이고, 단자도 고가는 아지만 나름대로 유명한 것이고, 익스펜더를 씌워서 보기 좋다는 점이 이 케이블로 듣는 소리를 기분상 더 좋게 들리게 하는데 일조한다.

이번에 만든 케이블에 2가지 아쉬움을 느끼는데, 첫 번째는 케이블의 무거움이고, 두 번째는 케이블의 뻣뻣함이다. 나름대로 다른 4심 마이크 케이블보다는 가볍지만 번들 케이블에 비해선 여전히 무거우며 뻣뻣하다. 이런 것들은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는데 쾌적한 음악 감상을 저해하는 요인이다. 다음에는 더 가볍고 유연한 케이블을 구해서 만들어 봐야겠다.

사실 내가 케이블에 가장 의미를 두는 부분은 만드는 재미다. DIY의 의미를 상기해보면 너무 뻔한 말 같지만 소리가 어떻고 혹은 내가 케이블을 어떻게 생각하는 가, 노력의 결과를 떠나서 케이블을 만드는 과정이 즐거웠다. 비록 그 과정이 수고스럽고 때론 실패를 겪기도 하지만 무엇인가를 자기 손으로 만들어가는 행위 자체가 큰 즐거움이다. ^^
      DIY(오디오…)  |  2006. 10. 7. 2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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